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직접 만든 이유
지난 글 끝에 편집기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다고 했었지. 이유가 있어. 전혀 생각지 못했던 전개가 펼쳐졌거든.
영상 한 편을 만드는 동안 내가 직접 봐야 하는 자리가 다섯 군데 있어. 그림이 시대에 맞는지, 음성이 대본과 어우러져 잘 나오는지. 전부 좋고 나쁨을 정하는 일이라 녀석한테 넘길 수 있는 자리가 아니야.
파일럿 때 제일 지쳤던 게 그 자리였어. 화면을 보다가 고칠 데가 눈에 띄면 대화창으로 돌아가서 말로 설명해야 했거든. 몇 번째 장면의 어디를 어떻게 수정하자고, 매번 말이야.
그래서 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게 된 거야. 웹앱이고, 장면을 보다가 멈춘 자리에 메모를 남기면 녀석이 그걸 접수해서 고치는 식이야. 길게 부르기 번거로우니 아래부터는 그냥 편집기라고 할게.
파일럿을 끝낼 때까진 아주 만족스러웠어. 이전에 만들었던 게임과는 달랐거든. 그것들은 이 녀석이 추천해준 거고 이번엔 내가 필요해서 만든 거니까. 이번 프로젝트에서 제일 마음에 든 결과물이라고 지난 글에 쓴 것도 진심이었고.
알고 보니 일회용이었다
사달은 두 번째 영상을 시작하면서 났어.
편집기를 켰는데 여전히 첫 영상이 올라와 있는 거야. 새 영상으로 갈아타고 작업을 이어가려니 이번엔 여기저기서 걸리기 시작했어.
서두에 말했던 생각지 못한 문제가 여기서 생겼어. 이 물건은 애초에 영상 한 편을 끝내는 도구였던 거야. 두 편째를 여는 상황이 설계에 아예 없었어.
"지금 편집하는 과정이 불편하니까 편집 프로그램을 아예 만들자."
그 결과물이 일회용이라니...
일회용으로 만들어달라고 한 적은 없어. 그런데 녀석은 이렇게 말해.
"계속 쓸 거라고도 말 안 했잖아."
"..."
여기가 사실 좀 멍해졌어. 그런데 그걸 꼭 말해야 하나? 편집 프로그램을 만들자고 했으면 계속 쓰는 물건인 게 당연하잖아. 워드를 한 번 쓰고 버리는 사람이 어디 있어.
사람끼리는 당연한 건 말 안 해도 통하는데 녀석한테는 말하지 않은 건 그냥 없는 거야.
이 대사가 생각나네.
"그냥 없어요."
아무튼 두 번째 영상은 시작도 못 하고 편집기부터 뜯어고쳤어. 도자기가 이미 화로에 들어갔는데 억지로 꺼내게 된 거지.

완성된 프로그램은 이렇게 작동해. 영상을 보다가 수정하고 싶은 곳이 있으면 영상을 멈추고, 내용을 설명하면 이 녀석이 수정하는 거지.
정식 편집을 익히면 더 좋을까? 그럴 확률이 높겠지. 그런데 언제 배우냐 이 말이야. 나중이라면 몰라도 아직 내게 필요한 과정은 아니야.
필수가 아니라 옵션이야
정비하겠다고 하니까 녀석이 고칠 목록부터 뽑아왔어. 일흔 개가 넘는대.
"이걸 다 고쳐야 한다고?"
"편집기가 아직 못 하는 것들이야."
"못 하는 게 왜 다 고칠 거리야? 편집기가 없어도 영상은 완성되잖아."
"맞아. 명령만으로도 끝까지 돌아."
"그럼 이건 필수가 아니라 일종의 옵션이잖아. 못 하는 게 왜 결함이야?"
편집기는 내가 중간에 좋다고 들어가는 자리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아닌데, 녀석이 그걸 필수 공정으로 알고 목록을 불렸던 거야.
이번에 제일 크게 배운 게 이거야. 이 물건이 뭔지 한 줄로 정해주면 할 일 목록이 저절로 줄어든다. 기능을 하나씩 지시하는 것보다 그게 훨씬 빨랐어.

반대로 녀석이 빼자고 한 걸 내가 막은 것도 있어.
"그럼 작업할 영상을 고르는 기능을 없애자. 지금 만드는 것만 다루면 되잖아."
"그거 없으면 지난 영상은 다시 못 여는 거 아니야?"
또 그 전제였어. 영상은 한 번 완성하면 끝이라는 것.
그런데 다 만들었다고 끝이 아니거든. 며칠 지나서 다시 보면 고칠 데가 또 보여. 그 기능이 있어야 지난 영상을 열어서 손보는 건데, 없으면 이 물건은 도로 일회용이 되는 거지.
비슷한 게 하나 더 있었어. 편집기 아래쪽엔 영상 조각을 늘어놓는 줄이 있는데, 어느 걸 먼저 붙일지는 내가 끌어서 맞춰.
조각들을 하나로 합치는 버튼을 눌러봤더니 합친 파일만 만드는 게 아니더라고. 그 줄까지 녀석이 다시 정리해놔서, 내가 맞춰둔 순서가 바뀌어 있었어.
"위치는 내가 정하는 거 아니야?"
"합친 김에 정리까지 해두면 편할 거라고 봤어."
"편한지 아닌지는 내가 정하는 거야."
이것도 되돌렸어. 도구는 파일만 만들고 늘어놓는 자리는 건드리지 않는 게 맞지. 내가 맞춰놓은 게 어느새 달라져 있으면 화면을 못 믿게 되니까.
필요한 기능을 말로 설명하기 힘들다
기능을 다듬는 동안에는 하루에 녀석의 제안을 넷이나 물렸어. 그날 따로 짚은 것까지 세면 더 많아.
"조절바를 왜 여기에 둔 거지? 위에 이미 바가 있는데?"
같은 걸 두 군데 두면 어느 쪽이 진짜인지 흐려지잖아. 이런 게 여기저기 널려 있었어.
"곡 걸기는 뭐야? 이해가 안 돼."
버튼 이름이 무슨 뜻인지 나부터 모르겠더라고. 컴퓨터에서 파일을 가져오는 것과 그걸 트랙에 올리는 것을 갈라놓고 나니, 뭘 고르는 칸 자체가 필요 없어졌어.
한두 개가 아니었어. 말로 설명하는 게 잘 통하지 않는 거지.
레퍼런스 이미지를 캡처해서 이건 이렇게 쓰는 거라고 그림으로 짚어주고 나서야 이야기가 통했어.
그러니까 이게 녀석이 못 알아들은 문제만은 아니야. 나도 내가 뭘 원하는지 말로 설명하기가 힘든 거야. 그런 기분 알아? 간지러워서 긁는 데 시원하지가 않은 거야. 안쪽 깊은 곳에 원인이 있는 것 같은 그런 느낌 말이야.

그래서 해결됐나
이번에도 다 정리하고 나서 녀석한테 물었어.
"이제 다음 영상도 이걸로 되는 거지?"
"돼. 한 편에만 맞춰져 있던 자리는 다 풀었어."
"처음부터 이렇게 만들었으면 됐잖아."
"삼촌이 그때 그렇게 말했으면 그렇게 만들었지."
"그걸 꼭 말해야 아는 거야? 넌 내 맘 몰라."
"..."
여기서 하루를 다 소비했어.
(그런데 말입니다.) 이거 참 배부른 소리라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. 몇 시간 만에 꽤 쓸만한 편집 프로그램을 만들었어. 예전이라면 상상이나 했겠냐고.
오늘의 결론
편집 프로그램을 만드는 과정을 돌아보면 고생한 이유가 몇 가지가 있어.
하나는 AI한테 일을 시키는 게 익숙하지 않았던 거. 사람끼리라면 말 안 해도 통할 것이 여기선 안 통한다는 걸 아직 몰랐던 거.
다른 하나는 내가 영상 편집이라는 걸 해본 적이 없다는 거야. 편집기에 무슨 기능이 있어야 하는지 나부터 몰랐으니 녀석이 만들어오는 족족 아니라고만 한 것도 당연하지.
그럼 앞으로는 당연한 것까지 하나하나 말해주면 되느냐, 그건 또 아니라고 생각해. 나한테 당연한 게 뭔지를 내가 모르는데 그걸 무슨 수로 다 말해.
당장의 해결책은 이거야. 어긋나는 건 못 막지만 일찍 발견할 수는 있어. 첫 영상을 끝냈을 때 "이거 다음 영상에도 쓸 수 있는 거지?" 하고 한 번만 물어봤으면 그날로 끝났을 일이거든.
잘 시킨다는 게 좋은 말을 고르는 일인 줄 알았는데 해보니 언제 확인하느냐가 그만큼 컸어. 늦게 알수록 만드는 일이 아니라 푸는 일이 되니까.
이 날은 유독 이 녀석과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많이 나눴어. 그래서 지침이며 프롬프트며 스킬까지 대대적으로 수정을 했어. 잘 작동할지는 아직 미지수야. 하지만 분명한 건 난 이 녀석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는 거야.
지난 글에서 다음 편을 덜 고생하려고 쓴 시간이 더 많았다고 했잖아. 이번에도 다음 영상을 시작하기 전에 그만큼을 썼어. 세 번째 영상 때 또 이 얘기를 하고 있으면 그땐 좀 곤란하겠지만 말이야.


